현대미포조선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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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지금?
김석진  2007-06-19 23:22:51, 조회 : 33,114, 추천 : 442



중국에 근대적 노동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한 1920년대 초 (1) 코민테른의

국제 노동운동 조직. 자본주의체제를 타파하여 노동자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사회주의사상과 <만국(萬國)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한다. 역사적으로 보아 대표적인 것은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제2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등이다. 혁명적인 국제조직의 시도는 일찍이 L.A. 블랑키 등이 조직한 계절사(季節社, 1837년 결성)나, 독일·폴란드·이탈리아 등지에서 온 망명자들에 의하여 창설되고 차티스트운동과도 관계가 있던 우애민주주의자협회(友愛民主主義者協會, 1846년 결성)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독일의 망명자와 직인(職人)들은 1836∼1838년경 정의자동맹(正義者同盟)을 결성했는데, 이것은 1847년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발전하여 제1인터내셔널의 모체가 되었다. K. 마르크스와 F.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으로 《공산당선언》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과학적 사회주의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문서이고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인터내셔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뒤에 인터내셔널의 슬로건이 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도 이 문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제1인터내셔널
정식명칭은 <국제노동자협회> 이다. 1848∼1849년 유럽혁명의 패배는 한때 노동운동을 침체시켰으나, 1858년 경제공황을 계기로 다시 활발해져서 전유럽 규모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이에 수반하여 노동운동을 국제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움직임도 되살아났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64년 9월 28일 런던에서 개최된 노동자국제회의에서 국제노동자협회가 설립되었다. 마르크스가 창립선언·규약 등을 기초(起草)했는데, 그 속에는 <노동의 해방>이 들어 있었다. 정치단체·노동조합·협동조합 단위의 참가뿐만 아니라 지역별 개인 가입도 이루어졌다. 최고결정기관은 대회이며 1866년 제네바, 1867년 로잔, 1868년 브뤼셀, 1869년 바젤, 1872년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다. 집행기관은 런던에 둔 총무위원회이고, 지역마다 지부가 만들어졌으며 조직원칙은 중앙집권적이었다. 실제 가맹인수는 불분명하지만, 제일 많았을 때는 2만 명 정도였다. 활동의 절정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71)에 대한 투쟁과 파리코뮌에서의 연대운동(1871)이었다. 처음에는 노동자의 경제적인 이해(利害)에 공통기반을 두는 정도의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적 조류(마르크스주의, 영국의 노동조합주의, 라틴계 여러 나라의 프루동주의,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바쿠닌주의, 독일의 라살주의)로 되어 있었으나, 1867년 로잔대회에서의 정치투쟁의 승인, 1868년 브뤼셀대회에서의 생산수단과 토지의 공유화 승인, 1871년 런던회의에서의 정치권력의 탈취와 독자적인 노동자정당결성의 결의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차츰 마르크스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1872년의 헤이그대회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M.A. 바쿠닌의 무정부주의의 대립이 격화하여 바쿠닌파가 추방되었고, 총무위원회의 소재지도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겨져 제1인터내셔널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마르크스파의 정식 해산선언은 1876년에 필라델피아의 총무위원회에서 이루어졌으며, 바쿠닌파도 1881년 런던대회 이후 인터내셔널의 유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제2인터내셔널
파리코뮌 뒤의 반동으로 인하여 정체되어 있던 노동운동은 1880년 후반의 경제공황으로 다시 부활하여,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1875년 결성)을 필두로 유럽 각국과 미국에 노동자정당이 생겼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이 인터내셔널을 결성할 기운도 고조되어, 1889년 7월 14일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20개국으로부터 파리에 모여든 사회주의자국제대회에서 제2인터내셔널이 사실상 결성되었다. 제1차대회는 1891년 브뤼셀에서 개최되었다. 제1인터내셔널과는 달리, 노동자정당이나 노동조합 등의 집단가입이 원칙이고 개인가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조직원칙은 없고, 1900년이 되어서야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이 브뤼셀에 설치되었으며, 그것도 사무연락기관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제2인터내셔널 활동의 제1기라고도 할 수 있는 1889∼1904년은 자본주의의 자유경쟁적 단계에서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해당되며, 노동자대표의 회의 참가나 출판자유 등의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합법적 활동조건이 생기는 한편, 노동귀족이나 조합관료도 출현하였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제2인터내셔널 가입정당은 대중 사이에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마르크스주의도 노동운동가운데서 지배적인 것이 되었으나,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최종목표(사회주의 달성)를 포기한 노동자의 개량주의·기회주의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895년 그때까지 최고의 지도자였던 엥겔스가 죽은 뒤 급속하게 강해졌으며, 1898년에는 E.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파리대회(1900)·암스테르담대회(1904)에서는 이 수정주의가 <언어상>으로는 비난을 받았으나, 비판의 선두에 섰던 K.J. 카우츠키 자신도 <행동상>으로는 수정주의에 빠졌다. 1904년 전후부터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단계로 돌입했고 열강 사이의 식민지분할과 제국주의전쟁의 시기에 들어갔는데, 이 시기에 제2인터내셔널로서의 최대문제는 닥쳐오는 제국주의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였으며, 이것을 둘러싸고 제2인터내셔널은 분열·해체되어 갔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대회, 1912년 바젤대회에서는 레닌과 R. 룩셈부르크의 노력으로 일단 전쟁반대 결의를 하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자본주의 타도에 이용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기회주의자에게 지도부를 장악당한 제2인터내셔널 가입정당은 러시아의 볼셰비키당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국정부의 제국주의전쟁 수행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소수파가 된 반전주의자는 1915년 스위스의 치머발트와 1916년 킨타르에서 국제주의자대회를 개최하여 다수파의 태도를 비난하고, 즉시 정전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 소수파 내부도 레닌 등에게 이끌려서 <제국주의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轉化)>를 주장한 <좌파>와 카우츠키·F. 아들러 등이 이끄는 <중앙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전자는 제3인터내셔널의 결성을 주장했고, 후자는 제2인터내셔널의 부활을 주장했다.

제2반(半)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노동자인터내셔널
러시아혁명과 제1차세계대전 종결 후, 옛 제2인터내셔널의 우파(右派)에 속해 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919년 2월 베른에서 재건을 위한 준비회를 개최했고, 1920년에는 제네바에서 제1차대회를 가졌다. 이것은 베른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린다. 한편 중앙파에 속하는 여러 정당(프랑스사회당·영국독립노동당·독일독립사회민주당·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 등)도 국제적 결집을 시도하여 1921년 2월 빈에서 국제사회당동맹(國際社會黨同盟)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빈인터내셔널이라고도 하는데, 무력에 의한 정권탈취 가능성과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승인 등을 강령으로 내세우면서도 러시아혁명에 대한 태도는 애매했기 때문에 제2반(半)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린다. 1922년에 베를린에서 있었던 3개의 인터내셔널(① 베른인터내셔널 ② 빈인터내셔널 ③ 코민테른)의 통일을 위한 국제회의가 실패한 뒤, 제2인터내셔널(베른인터내셔널)과 제2반인터내셔널(빈인터내셔널)이 통합되어 사회주의노동자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고(1923년 5월), 정치적으로는 제2인터내셔널의 기조(基調)를 계승하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당은 가끔 정치에도 참가했으나 사회주의적 변혁에 착수할 수는 없었고, 제3인터내셔널과의 통일전선에는 소극적이었으며 파시즘의 대두와 제2차세계대전중에 해체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뒤의 코미스코(1947년 결성)·사회주의인터내셔널(1951년 결성)이 이에 속한다.

제3인터내셔널
정식명칭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이며, 코민테른이라는 약칭이 사용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의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를 확인하고, 러시아혁명을 승리로 이끈 레닌은 이 혁명을 세계혁명으로 확대·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1919년 1월 제3인터내셔널을 소집한다는 격문(檄文)을 발표하고, 같은 해 3월 2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국제공산주의자회의에서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선언하였다. 창립회의에는 21개국 35개 조직을 대표하는 52명의 대표가 참석했으나, 그 중심은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및 1918년 말에 갓 결당(結黨)한, 제3인터내셔널 창설은 당초 시기상조라는 견해를 보이던 독일공산당이었다. 제3인터내셔널의 활동은 1919∼1923년 혁명적 정세기(情勢期), 1924∼1928년의 상대적 안정기, 1929∼1933년의 대공황기, 1934∼1938년의 반파쇼투쟁기, 1939∼1943년의 제2차세계대전기로 대략 구분할 수 있는데, 그 4반세기의 활동을 통하여 서유럽의 여러 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를 포함한 전 세계에 공산주의정당을 결성하고 공산주의사상을 보급시켜서 수많은 공산주의 활동가를 육성하였다. 레닌이 살아 있던 초기의 코민테른은 러시아혁명의 세계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특히 독일혁명의 성공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나, 제1차세계대전 뒤 자본주의의 부흥과 제2인터내셔널 재건의 움직임 속에서 우선 각국 공산당의 사상강화와 대중화의 우회(迂回)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프롤레타리아통일전선과 노동자정부수립 전술이 채택되었다(1922년 제4차대회). 레닌의 죽음과 독일에서의 노동자정부 수립의 시도가 실패한 뒤 제3인터내셔널은 차츰 소련공산당의 정책에 좌우되게 되었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I. 스탈린이 해석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적으로는 볼셰비키당의 조직원칙이었던 <민주집중제(民主集中制)>가 각국 공산당을 구속하게 되어, 각국 공산당은 <단일세계당(單一世界黨)>의 지부로서 모스크바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복종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1920년대 후반의,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일국사회주의(一國社會主義)> 등을 둘러싼 정쟁(政爭)은 각국 지부에도 파급되었으며, 제명당한 트로츠키파는 나중에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하였다. 또한 대공황기에는 소련 내에서 <일국사회주의건설>의 강행(공업화와 농업집단화, 제1차5개년계획)에 조응(照應)한 좌익주의적 전술(사회파시즘론·계급대계급론·적색노동조합주의)이 채용되어 통일전선적(統一戰線的) 전술은 뒤로 밀려났다. 1935년 7∼8월의 제7차대회에서 반파시즘의 광범한 통일전선·인민전선으로 그 전략을 전환시켜서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인민전선정부 수립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반면에 소련의 내정(內政)과 외교에 차츰 종속되어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스탈린숭배가 강해졌고 조직적으로는 소련의 국외적(局外的) 역할까지도 담당하게 되었으며, 모스크바에 있던 제3인터내셔널 활동가 중 많은 사람이 스탈린 숙청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뒤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과 반파시즘 미·영·소 연합의 성립으로 인해, 소련의 입장으로서는 제3인터내셔널은 별 의미가 없게 되어, 대회도 열지 않은 채 해산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1947년에 유럽공산당·노동자당 정보국(코민포름)이 결성되었으나, <스탈린비판>과 함께 1956년 해산되었다. 그 이후의 국제공산주의운동은 유로코뮤니즘 등 자주적인 조류(潮流)의 대두와 함께 각당 사이의 개별적 교섭·연락에 위임되고 있다.


(2)적극적인 지원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으로 탄생하였다(1921.7.).

K.마르크스 사후 그의 사상은 독일의 K.카우츠키와 러시아의 레닌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전자는 독일파 마르크스주의인 사회민주주의이고, 후자는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공산주의이다. 이는 레닌이 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해 성립된 과학적 사회주의를 기본으로 19세기 이후의 독점자본과 제국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현실을 반영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하여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혁명 시대에 있어서의 마르크스주의’라고 규정하는 한편, ‘마르크스-레닌주의란 혁명의 과학이며 파괴의 기술’이라고 정의하여 이를 확립하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통일체로서 파악되며, 이것을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론은 주로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비롯되었고 혁명론과 전술은 레닌에 의하여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917년 이후 소련의 지도이념이 되었으나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에 의하여 수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이 있은 후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등의 공산당, 즉 유러코뮤니즘(Eurocommunism)은 프롤레타리아독재 및 레닌주의의 포기, 모스크바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함으로써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결정적 시련에 봉착하였다.

이어 1924년 쑨원[孫文(손문)]이 지도하는 국민당과 합작하여, 함께 봉건군벌의 타도를 위한 북벌(北伐, 1926)을 통해서 처음으로 발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북벌 도중에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4·12반공쿠데타(1927)를 계기로 하여 국·공(國共)이 분열되었고, 이로부터 공산당은 독자적으로 중국혁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는 외국의 제국주의와 봉건적 지주제도로 인해 억압받고 있는 압도적 다수의 농민들을 배경으로, 변혁과 해방을 추구하는 그들의 힘을 모아, 민족의 해방과 민주적인 방법으로 중국혁명을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노선은 토지개혁을 통하여 농촌의 근거지 또는 해방구를 만들면서 그것을 점차 확대시켜 나간다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3) 국민당과의 전쟁(1927∼36)과 제2차 국·공합작에 의한 항일전쟁(1937∼45) 등을 겪으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립, 확대하였고,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다시 국·공내전을 재개하여 승리함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1912년:
1월 1일: 난징(南京)에서 송교인 (宋敎仁 숭찌아오젠)과 쑨원 (孫文)이 중화민국 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를 구성하였다. 쑨원이 임시 대총통직을 맡았다.
2월: 신해혁명(辛亥革命)을 통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를 퇴위시키고자, 당시 군권을 장악했던 위안스카이 (袁世凱 원세개) 와의 막후 협상을 하였고, 그 결과 쑨원이 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이임하였다.
7월-8월: 동맹회(同盟會)를 주측으로 국민당으로 개편되고 쑨원이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13년: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대리 이사장 송교인을 암살하고 국민당과 국민당 의회를 해산한다. 쑨원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비밀결사인 중화혁명당을 조직한다.
1914년: 쑨원이 중화혁명당을 광주에서 확대 조직한다.
1919년: 중화혁명당이 국민당으로 개칭된다.
1924년: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주에서 소집. 쑨원의 삼민주의를 포함한 정치 이념을 강령으로 채택한다. 당시의 국민당은 소련의 지원을 많이 받은 바, 중국공산당 계열의 인물을 포함하는 연합정국의 형세였으며, 이 전국대표회의는 제1차 국공합작의 시작점이 된다. 소련과 연합전선을 취하고 (聯蘇), 공산당원을 받아들이며 (容共) 농업과 공업을 중요시 한다는 (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통하여 국공합작이 전개되었다. 공산당원은 공산당 당적을 보유한 채, 개인의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을 취하여 공산당 대표인 리다자오 (李大釗 이대소), 마오쩌둥 (毛澤東 모택동) 등의 공산계열 인원 여럿이 국민당 요직에 선출되었다.
1925년: 쑨원 사망. 장제스가 뒤를 이어서 국민당 계열을 이끌게 된다.
1926년 2월: 장제스가 베이징 정부 (장쭤린의 군벌 정부)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며 북진한다.
1927년: 북진중이던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4.12에 반공 숙청을 실시한다. 이로서 제1차 국공합작은 끝나게 되며, 10여 년 동안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시작되게 된다. 난징 (南京)을 수도로 정한다.
1928년: 장제스의 국민당이 베이징에 입성하면서 중국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 (張學良 장학량) 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하는 시안사건(西安事變)을 일으킨다. 시안사건은 제2차 국공합작의 시발점이 된다.
1937년 - 1945년: 항일 전쟁. 중일 전쟁의 시기이다.
1946년 - 1949년: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국민당은 대만으로 물러서게 된다.







건국 후
혁명의 지도자인 당주석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건국 후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여 농업의 집단화와 상공업의 국유화를 진행시켰으며, 1958년 이른바 <대약진운동>의 시기를 맞이하나 이 급진적인 정책이 실패하여 오히려 당내에 깊은 균열이 생겨 마침내 1966년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이것은 마오쩌둥이 <당내에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가 생겨서 수정주의로 향하는 변질의 위험이 눈앞에 닥쳤다>고 주장하며, 대중에게 널리 탈권투쟁(奪權鬪爭)을 호소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장투쟁을 수반하는 격렬한 투쟁과 극좌적인 노선이 전국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고 마오쩌둥의 죽음(1976. 9.), 사인방(四人幇)의 추방(1976. 10.)과 함께 (4)문화대혁명은 많은 피해와 상흔을 남기고 끝났다. 그 뒤 당의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4대 현대화(四大現代化) 노선을 제시하고 사회주의 현대화를 목표로 중국을 지도하였다.



요약
마오쩌둥의 주도로 1965년 가을부터 10년간 중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정치적·사회적 동란.




설명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주도로 1965년 가을부터 10년간 중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정치적·사회적 동란. 중국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 했던 이 혁명은 사회주의 사회 혁명운동으로서 중국사회를 격심하게 뒤흔들어 전례없는 혼란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1966년 여름에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갑자기 출현했던 홍위병 운동과 정치지도자의 잇단 실각, 마오쩌둥 절대권력의 확립이라는 사태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대변동이었다.

당시의 규정
중국에서는 당시 문화대혁명을 <사람의 혼을 움직이는 혁명>이라 강조하였고, <중국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구분짓는 것으로 공식 규정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1962년 9월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0회 전체회의(약칭 제8기 10중전회)에서 전당(全黨)·전인민에게 내렸던 <절대로 계급과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출발점으로 한 것인데, 이 <혁명>의 최대 목표는 사회주의 사회 계급투쟁의 관철에 있었으며, 우선은 <당내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한 줌의 실권파>를 뿌리째 타도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 했다.

3가지 측면
문화대혁명은 일관하여 중국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적인 성질과 당내투쟁의 대중운동화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에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사회적 측면 3가지가 있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문화대혁명 제1단계에서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함과 동시에 린뱌오[林彪(임표)]를 당부주석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삼는 새로운 정치적 지도권을 강행적으로 확립했다. 그러나 이것은 린뱌오를 중심으로 한 인민해방군의 주도에 의하지 않는 한,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을 비롯한 이른바 실권파 세력으로부터의 탈권(奪權)이 불가능했다는 것도 나타냈으며, 여기에 병영(兵營) 체제화한 중국 권력중추의 정치위기의 내부모순이 나타났던 것이다. 1971년 9월 일어난 충격적 린뱌오이변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때 문화대혁명은 처음에는 <문예정풍(文藝整風)>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종래의 문화나 가치의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그 발전단계에서 인류문화유산을 어떻게 계승하여 나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고, 이 점에서 중국은 자기 문명사를 철저하게 고쳐 쓰려는 듯했으나 <마오쩌둥사상>의 절대화는 사상이나 문화를 본래적인 생명에서가 아니라,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로의 기능이라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이른바 <빈곤의 유토피아>를 추구하여 중국사회를 변혁시키려고 했던 것이고, 마오쩌둥의 의식에는 도시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사회의 새로운 계층화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구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절대적인 마오쩌둥 가부장체제 아래에서 그것을 실천하려는 단계에 중국 민중의 저항을 받고 중국전통사회의 두꺼운 벽에 부딪쳐 마오쩌둥의 이상은 마침내 좌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5년 여름의 항저우사건[杭州事件(항주사건)], 1976년 4월의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 정치에 대한 민중의 반란이었고, 같은해 10월 베이징정변[北京政變(북경정변)]으로 마오쩌둥 측근인 <사인방(四人幇)>은 실각되고 말았다.

전개과정
마오쩌둥은 장칭[江靑(강청)]·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 등 이른바 <장칭문예살롱> 인사들이 모였던 상하이에서 문학대혁명의 개막을 알리고, 1965년 11월 10일 젊은 문예비평가 야오원위안[姚文元(요문원);당시 상하이시당위원회 서기]은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역사학자로서 이름난 베이징시 부시장인 우한에 대한 전면적 비판을 시작했다. 우한 비판은 베이징의 지도적 지식인들, 이른바 <삼가촌(三家村)그룹>에 대한 비판 쪽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윽고 당베이징시당위원회가 실권파 아성이라고 격렬히 비판되었고, 펑전[彭眞(팽진)]·베이징시장(당베이징시 위원회 제1서기) 등이 일제히 규탄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1966년 4월 상순, 베이징시 당위원회가 개편되었고, 4월 18일자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 사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으로 처음 공식규명했다. 이어서 5월 16일 문화대혁명의 신호나팔 구실을 했던 당 중앙 <통지>를 공포하고, 당 중앙 문혁소조(조장 陳伯達, 제1부조장 장칭)를 설치했다. 이윽고 5월 25일 베이징대학의 젊은 여성교사 녜위안츠가 교장 루핑[陵平(능평)] 등을 <삼가촌그룹>의 일파라고 격렬히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6월 1일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전국에 방송토록 지시하고, 이를 <20세기 1960년대 중국의 파리코뮌 선언서>라고 찬양했다. 6월 3일 펑전 등의 해임과 베이징시당위원회의 개편을 발표하고, 실권파 아성의 붕괴를 알림과 동시에 <마오쩌둥사상>을 견지해 온 린뱌오의 공적이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19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11중전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마오쩌둥은 회기중이었던 8월 5일 <사령부를 포격하자-나의 대자보>를 스스로 붙였고, 8월 8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1966년 8월 18일 천안문광장에서 제1회 100만명집회에 모였던 홍위병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 가두진출하여 <마오쩌둥사상>을 찬양하면서 격렬한 옛 문화 파괴행동을 벌였다. 문화대혁명은 홍위병 중심의 가두투쟁단계에서 실권파 타도를 위한 탈권투쟁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실권파의 저항도 끈질겨 각지에서 탈권과 반탈권 사이의 무력투쟁이 계속되었을 때, 린뱌오휘하의 인민해방군은 1967년 1월 23일 탈권투쟁에 대한 군의 전면개입을 결정했다. <1월혁명>이라는 상하이의 탈권투쟁에서 상하이의 반란파는 코뮌형 권력을 구상하기 시작하였으나, 마오쩌둥 등 당 중앙은 이 코뮌구상을 갑자기 눌러버렸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한 전환점이 되었고, 그 뒤 마오쩌둥·린뱌오주류파는 혁명파의 <대연합>에 의한 탈권을 호소하며 혁명간부, 군 대표, 혁명적 대중대표로 이루어진 <삼결합(三結合)>의 혁명위원회를 수립하라고 호소했고, 혁명위원회는 1968년 9월까지 전국의 모든 1급 행정구에 성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대회(약칭 9전대회)가 1969년 4월에, 1956년의 8전대회 이래 13년만에 열렸다. 이 9전대회는 문화대혁명이 위로부터의 당재건이라는 큰 전환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마오쩌둥의 비길 데 없는 권위를 확립하고 린뱌오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의식이었다. 그 동안 마오쩌둥 측근으로 문혁소조 조장이었던 천보다[陳伯達(진백달)]는 1970년 8∼9월 제9기 2중전회에서 <대야심가·음모가>라 하여 실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린뱌오이변이었다. 린뱌오이변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나, 1973년 7월 중국당국은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몽골에서 추락사하였다고 발표했다. 문화대혁명의 한 중대한 결말이 된 린뱌오이변이라는 심각한 사건 후인 1973년 8월 중국공산당 10전대회가 열렸다. 10전대회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정치보고, 왕훙원[王洪文(왕홍문)]의 당규약개정 보고를 채택한 뒤에 새로운 중앙 지도부를 선출했다. 중앙위원회 주석에 마오쩌둥을, 부주석에 9전대회 때 부주석이 린뱌오 단 한 사람이었던 데 반해 저우언라이·왕훙원·캉성(康生)·예젠잉[葉劍英(엽검영)]·리더성[李德生(이덕생)] 등 5명을 선출했다. 이 10전대회는 린뱌오 처단과 대(對)소련 비난을 거당적으로 실시한 의식을 나타냈으나, <마오쩌둥체제하의 비(非)마오쩌둥화>와 탈문화대혁명을 지향하는 <조류>의 크기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10전후회 전후에 일어난 공자 비판·시황제(始皇帝) 예찬 운동은 이윽고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 되어 이른바 <반조류>의 반격이 일어나 마오쩌둥체제 말기의 내부각축은 차츰 치열해갔다. 1975년 여름에 일어난 항저우사건은 공장노동자의 임금인상요구동맹파업이 몰고 온 항저우 일대의 혼란을 군대가 제압한 사건이었고, <빈곤의 유토피아>를 강제해왔던 마오쩌둥체제의 말기적인 사회적 모순을 안으로부터 노정시킨 사건이었다. 이리하여 <조류>와 <반조류>가 내부적으로 각축하는 가운데,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총리는 병으로 쓰러졌다.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읽었던 덩샤오핑부총리는 감히 <4개의 현대화>노선 계승을 문혁파 지도자의 면전에서 서약하여 문혁파들을 크게 초조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주자파(走資派)> 비판운동이 1976년 2월 초순부터 일제히 전개되었다. 2월 초순에는 문혁파 비(非)상하이그룹의 화궈펑[華國鋒(화국봉)]이 국무원총리대행으로 마오쩌둥의 지명을 받아 일약 부각되었으나, 이러한 <역류>에 대한 대중적 항의로 일어난 것이 천안문사건이었다. 당 중앙은 이 사건을 <반혁명>사건으로 단죄하고 덩샤오핑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켰으나, 후에 천안문사건이 재평가되었을 때에는 <위대한 4·5운동>으로 찬양되었듯이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체제하의 대중반란으로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어 중국의 권력중추는 마오쩌둥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후계권력 싸움이 마오쩌둥 측근체제 내부에서 격화되었다. 마오쩌둥의 죽음을 결정적인 계기로 하여 10월 7일에는 <기정방침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마오쩌둥의 유훈(遺訓)을 내걸고, 권력계승권을 재빨리 주장했던 문혁파 상하이 그룹인 <사인방>이 모두 실각하는 충격적인 베이징정변과 함께 화궈펑체제가 일거에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화궈펑은 마오쩌둥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당신이 한다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또 하나의 마오쩌둥 유훈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그림자>는 이윽고 중국내정 전체의 마오쩌둥화가 진전됨에 따라 화궈펑의 정치적 장래를 흐리게 하여 1977년 7월에는 중국공산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재부활되었다. 같은 해 8월의 중국공산당 제11기전대회에서는 새로운 당규약 가운데 <4개의 현대화>가 명기(明記)되었고,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는 통일적인 국가목표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은 오늘날의 <4개의 현대화>라는 노선으로 크게 선회하였다.

오늘날의 평가
중국은 1979년 10월 1일, 건국 30주년을 맞아 그 축하집회에서 예젠잉이 처음으로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한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6중전회에 의한 <건국 이래의 당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이 당의 결의에 의해 정식으로 부인되어 류사오치를 비롯하여 문화대혁명으로 타도된 지도자 모두를 복귀 또는 명예회복시키는 한편, 문혁파는 모두 실추하여 비마오쩌둥화가 진전되었다.













지위
중화인민공화국은 제도상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도 민주정당이라고 불리는 몇 개의 정당이 있고, 각 정당은 헌법을 활동의 근본준칙으로 삼도록 현 헌법의 전문(前文)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전문에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이 명기되어 있고 또 당규약에서는 <중국공산당은 중국 노동자계급의 전위(前衛)이고 중국 각 민족 인민 이익의 충실한 대표이며 중국 사회주의 사업의 지도적 중핵(中核)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당이 모든 의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지도하는 정치세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다.

기구
당은 최고지도기관으로서 전국대표대회(5년마다 개최)와 여기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위원과 후보위원 319명)가 있다. 중앙위원회의 아래에는 중앙정치국과 중앙서기처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가 있고 이 밖에 당의 중앙조직으로서 중앙고문위원회와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있다. 이 가운데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중앙정치국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은 성(省), 자치구(自治區), 현(縣), 시(市) 등에 지방조직을 두고 그 아래에 공장, 상점, 학교, 향(鄕), 진(鎭) 등에 기초조직을 두며 가장 말단에 이르기까지 조직을 가지고 있다. 또 당이 직접 지도하는 청년대중조직으로서 공산주의청년단이 결성되어 있다.

방향
중국공산당은 다년간의 혁명투쟁의 경험에서 <대중노선>과(5)<정풍운동(整風運動)>이라는 독특한 운동방식을 만들어왔다. 그것은 대중의 참여에 의해서 혁명운동을 추진하고, 또 대중으로부터의 유리(遊離)를 방지하기 위하여 당풍을 정비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 방식은 사회주의 건설에 오히려 큰 정치적 동요를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문화대혁명의 비참했던 경험을 거쳐 오늘날에는 당규율의 엄수, 민주주의와 법제도의 확립이라는 형태로 사회주의 현대화를 위한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


정풍운동 (整風運動) 단어장에 추가

요약
중국공산당의 자체 정비운동.




설명


중국공산당의 자체 정비운동. <풍(風)>이란 모든 사물의 그대로의 상태를 말하며 <정풍(整風)>은 그 <풍>을 정리·정돈한다는 의미이다. 중국공산당이 간부의 활동이론과 실천방법을 바로잡기 위해 벌인 운동으로 1942년 옌안[延安(연안)]을 중심으로 처음 전개되었다. 당시 일본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80만을 헤아리던 당원들 사이에는 주관주의·당파주의·형식주의 등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이론을 중심으로 <주관주의에 반대하여 학풍(學風)을 정비하자> <당파주의에 반대하여 당풍(黨風)을 정비하자> <공허한 형식주의에 반대하여 문풍(文風)을 정비하자>는 이른바 <삼풍정돈(三風整頓)>을 기조(基調)로 하는 운동을 제기하였다. 구체적 실천 방안은, 먼저 <정풍문헌>을 지정, 학습하여 의식을 통일한 뒤 확실한 비판을 전개하고 끝으로 자기점검 내용을 글로 쓴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병을 고쳐 사람을 구한다>고 표현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중국이 스탈린체제의 <숙청을 통한 당건설>에서 한 걸음 벗어나 <자기비판>을 설득수단으로 삼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옌안에서의 실시 후에도 <정풍>은 중국공산당 건설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되어 수년에 한번은 전당(全黨)을 대상으로 운동이 실시되었고 점차 반복·확장되어 갔다. 1942∼1944년 옌안에서는 항일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1921년 중국공산당 성립 이래 가장 큰 힘을 결집시켰으며, 1957∼1958년의 반우파(反右派) 투쟁 때에는,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발언력 강화로 힘을 얻은 우파에 대응하여 집단소유제 정착과 공산주의사상 강화에 기여하였다. 정풍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긍정적이었으나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는, 지나치게 빨랐던 개혁속도나 과도한 개인비판 등으로 인한 폐해가 지적되기도 하였다.










현대화 노선
1980년대에 들어 현대화 노선으로 크게 전환한 당은, 구체적으로 시장원리의 도입에 의한 경제개혁과 선진 여러 나라로부터 기술과 자본의 도입이라는 개방정책을 취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으며, 동시에 재차 정치체제에 대한 개혁이라는 과제까지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전환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문제와 관련되고,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당의 통일적 지도에 대한 비판까지도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노선전환을 시도한 당은 거기에 수반되는 많은 모순과 정치적 동요 및 시행착오를 예견하면서, <현대화>라는 과제를 완수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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